손톱

조회 수 1642 추천 수 0 2019.06.15 05:21:21

“여기, 양념 양꼬치 2인분 추가요. 마늘꼬치도 가져다 주세요.”

“네~”

꽝꽝 얼어버린 양고기를 꼬치에 끼우던 나는 이내 목장갑을 벗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냉장고에서 양꼬치 2인분을 꺼내 접시에 담으며 자연스레 핸드폰을 보니 벌써 시간이 11시이다. 아르바이트가 끝나려면 3시간 정도가 더 남았다. 한숨을 쉬며 음식을 들고 주방을 나가는 중 핸드폰이 울렸다.

‘알바중?’

그 사람이었다. 내가 항상 열망하던, 내가 가진 모든 애정과 에너지를 퍼부어도 아깝지 않은 사람.

‘엉 ㅋㅋ 오늘 손님이 많네 힘들어 죽겠다 ㅠㅠ

‘몇시에 끝나?’

이 질문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에게 시도때도 없이 고백한지가 벌써 두달이 다 되어간다. 그는 늘 한결같았다. 한결 같은 거절. 그의 여러 번의 거절을 상기할때면 알싸한 알코올 냄새가 함께 하는 것만 같다.

 "나는, 지금 연애를 할 여력이 없다. 나는 말이야, 삼수를 했어. 내 친구들은! 다 졸업반이고! 취업하고! 하아... 그런데 어쩌냐? 나는 이제 2학년인데. 토플이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나는 연애를 할수가 없다~ 이말이예요."

그런식의 거절은 자꾸만 나한테 여지를 준다. 상황이 좋지 않을 뿐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미래를 준비하는데에 있어서 방해되지 않는, 혹은 도움이 되는 애인일수 있다면 그는 나랑 연애를 하고 싶은 것이 아닐까? 나의 고백 또는 연애 제안에 대한 숱한 거절들은, 나를 거절한게 아니라.. 그의 상황이...

"임마! 거 앞에 서서 뭐해! 얼른 고기 가져다 드려!"

"! !!!"

그래 정신을 차리고 일이나 하자. 혼자 암만 생각해도 거절은 거절이지 뭐. 뭐 다 좋으면 거절했겠나. 일하자 일! 일단 몇시에 끝나는지 대답만 좀 해보고

"사장님 저 담배하나 피고 옵니다!!"

"오케이~"

 

담배에 불을 붙히며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 본다.

'나 오늘 두시! ?? 또 술먹자고??ㅋㅋ'

얼마 지나지 않아 오는 대답은

'잠깐 전화 가능해?'

 

무슨일일까. 궁금해서 바로 전화를 걸어보니, 그는 늘 그래왔듯이 태연하고, 약간은 거만한 말투로 전화를 받는다.

", 별건 아니고, 일끝나고 뭐 하는일 있냐?"

"아니 없지 뭐 ㅋㅋㅋ 왜왜 왜그러시는데요~~ 알콜중독자야 또 술마시자 그럴라하지! 나 아직 엊그제 숙취에서 못 헤어나왔다?"

"아 술 마시자는거 아니야~ 뭔 너는 내가 맨날 술만 쳐먹는사람인줄아냐?"

"아 그럼 뭔데! 말을 하세요! 앗 혹시! 오늘은 내 고백을 받아줄 준비가 된거야?!? 드디어?!?"

"어휴... 진짜 너도 참 징하다. 그딴거 아니고. 김칫국 그만 마셔 이 지지배야. 너 접때 오밤중에 깜깜할때 한강가보고 싶대매."

"엉 근데? 나 일 끝나면 두시라니께?"

"아 쫌! 조선말은 끝까지 좀 들어봐라 쫌! 하여간 승질 급해서.. 그러니까! 엄마 차 빌렸어. 이따 데릴러 갈테니까 한강 보고오던지."

"에에에? 갑자기? 일단 좋고! 나는 당연 좋지! 그런데 나 일단은 일하러 들어가야되거든? 그럼 일단 그런걸로 알고있을게??"

"그래 두시까지 가게 근처로 갈테니까 끝나면 전화해"

"~"

 

뭘까. 뭘까. 갑자기 머리 위로 종이 울리는 기분. 오늘 정말 뭔가 무슨일이 일어나도 일어날것만 같은 너무나 좋은 예감...! 이라고 생각하다가 이내 부러 불행한 상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냥 오랜만에 한강에 가고 싶은데 같이 갈 사람이 딱히 없는걸꺼야. 아니면 내가 밤에 한강을 한번도 가본적이 없다고 해서 내가 불쌍했거나. 아니면 음...그냥 오랜만에 운전을 연습하고 싶었을수도?

실망하지 않기 위해 불행한 상상을 마구마구해도 자꾸만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나온다. '오늘 뭐입고 나왔더라? 옷에 고기냄새 날텐데 으으 어떻게 하면 좋아.. 거울, 거울 아직 화장은 남아있나?'

핸드폰을 켜서 얼굴을 비춰보는데 당연히 화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 살짝 긴 손톱이 눈에 걸린다.

'손톱이라도 자르자! 당장 화장품도 없고! 손톱 길면 지저분해보일수도 있으니까는..'

"사장님!!!! 저 손톱깎이쫌!!! 쓸께요!!!"

바지런히 손톱을 깎고 옷 매무새를 살피는 중 휴대폰이 울린다.

'가게 오른쪽에 차 대놓음'

신이 나다가 부러 불행한 척을 하다가 또 신이 나다가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나는 차 안에 앉아있다. 싱글벙글 웃으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한강에 가고 싶었냐는 둥, 왜 하필이면 나랑 가냐는 둥, 무슨 의미가 있는거냐며 얼굴에 철판을 깔고 물어보기 시작한다. 당신에 대한 나의 애정을 여과없이 드러내며, 민망하지만 하나도 민망하지 않은 척, 늘 그래왔듯이, 자연스레 그와의 대화 속에서 나의 '더 사랑하는 을'의 자리를 찾아간다.

한강에 도착해 까맣고 속을 모르겠는 밤하늘과 강물을 바라보며 우리는 서있었다. 강물을 바라보는 그는 팔짱을 끼고 있었고, 나는 하늘을 바라보다 이내 그를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괜히 설레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지금 이 순간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 없는 순간일 것임을 마음속으로 되내이며, 그래도 그가 나를 조금은 사랑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심이 자꾸만 불쑥 튀어나왔다.

그는 매서운듯 따뜻한 눈두덩이와 굳게 다물어져있지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예쁜 사람이었다. 어깨가 다부져서 기대고 싶은 사람이었다. 어쩜 완벽하게도 손가락도 가늘고 예쁜 사람. 그 순간 웃음이 났다. 그의 손톱은 마치 방금 자른듯이 짧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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