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개월간의 현장 참여관찰 참견간섭 연구를 마치고 캐나다로 돌아간 디디가 텀페이퍼의 1부를 번역해서 보내왔습니다.

영문은 파일로 첨부합니다.


뒷부분도 더 번역하고, 수정할 계획이지만...

궁금하신분들을 위해 먼저 초고를 공유합니다.

잘 읽어보시고 의견주시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영문은 나마스떼와 함께 읽기/번역 모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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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 혹은 여행자의 공산주의(초고)


디디(빈연구소)



‘빈집’은 세계적인 거대 도시 서울에서 다른 방식의 주거와 대안적 경제체제를 고안함으로써 공통적인것을 생산해내고 있는 자율적 실험이다. 빈집의 구성원들은 사유공간인 집을 공유지로 재정의-선언하고, 혈연관계를 넘어선 집단적인 주거의 방식을 구성함으로써  소유권의 의미는 물론, 근대적인 공간의 배치마저 급진적으로 돌파하고 있다. 본 연구는 빈집의 구성원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지속적인 미시정치를 통해 생산해내는 신체와 감각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를 위해 빈집의 지난 6년간의 실험이 기록된 웹사이트와 위키, 팀블로그 및 구성원 각자의 블로그등에서 수집한 자료, 관련 문헌을 분석하는 한편 연구자 스스로 4개월간 빈집에 거주하면서 참여관찰및 인터뷰를 수행하였다. 연구의 첫 단계로서 이 글은 자본주의적 삶을 넘어서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빈집에 내재해 있는 원리를 분석하고, 그러한 원리가 이념이나 윤리의 차원이 아닌 일상의 차원에서 실천되는 빈집의 실험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맥락에서 촉발되었는지를 이해하고자 한다.

1. 빈집의 원리, “여행자의 공산주의”


빈집에는 주인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곳의 모두가 손님이다. 당신이 빈집에 잠시 머무르는 중이라면 당신은 단투 (단기투숙자)라 불리울 것이고, 좀 오래 머물러서 살고 있으면 장투 (장기투숙자)로 분류된다. 어떤 이유로든 빈집에서 지내볼까 라고 생각한 이상 당신은 아마도 홈페이지를 들여다보거나 빈집이 소개된 신문 기사들을 찾아보리라. 좀 더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로 문의를 하거나 직접 찾아가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떻든 빈집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건 쉽지 않다. 당신의 질문에 빈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주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뭐, 숙박업소처럼 누가 챙겨주거나 서비스를 해주는 건 아니구요. 네.. 모여서 살고 있어요. 집마다 상황은 조금씩 다르구요. 아, 와서 며칠 지내보시면서 결정하셔도 돼요.”
    내가 빈집에서 지내던 어느날의 일이다. 여느때처럼 좁은 거실에서 여러명이 빈둥거리며 수다를 떠는 와중, 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옆방으로 가서 한참 통화를 한 친구가, 거실로 돌아오더니 말했다.


“중년 아줌만데, 좀 상황이 안좋은가봐. 뭐, 횡설수설하면서 신세 한탄을 한참 하더니.. 뭐, 남편이 폭력적이고 큰아들도 그런거 같은데. 아무튼 그러더니 여기 오고 싶다고 하는데, 자기 아들을 보내고 싶다고 하는건지, 자기가 오고 싶다고 하는건지도 잘 모르겠어.”
 “그런 전화, 좀 오랜만이다. 그치?”
다른 한 친구가 끼어들었다. 그런 전화가 뭔지는 분명치 않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그런 전화가 많이 걸려오냐고 물었다.
    “응, 꽤 자주 와.”
전화를 받았던 친구가 대답했다.
    “아무튼, 뭐 와서 지내보셔도 된다고 했어. 근데.. 그 아줌마가 갑자기..”
그는, 약간 은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빈집에서는 사람들이 안싸우죠? 그렇죠? 그러는거야.”
잠깐의 침묵후, 우리는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름모를 중년의 아줌마에 대한 안쓰러움을 느끼면서.
    “그래서, 뭐라고 했어?”
    “응, 뭐. 우리 싸워요. 맨날맨날 싸워요. 그랬지. 그랬더니, 아 그렇군요. 거기도 사람사는 데군요. 그러더라.”


    나는 이 짧은 대화가 빈집에 관한 꽤 중요한 지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믿는다. 그 중년의 여인은 아마도 “도심 정글속 생태공간"이라거나 “빈말이 현실이 되는 곳", “옆방 남자 무서워하는 일, 이 곳에선 없어요"라는 둥  빈집을 이상적으로 소개한 신문 기사들을 읽었을 것이다. 어쩌면, 빈집을 다녀간 사람들이 게시판에 남긴 후기를 읽었을지도 모른다. 빈집을 처음 경험한 사람의 후기들은 주로 “이상한", “낯선 경험", “전혀 새로운" 등의 단어로 빈집의 인상을 소개한다. 빈집의 어떤점이 그렇게 이상한걸까? 혹은, 빈집의 어떤 측면이 사람들로 하여금 쉽사리 그곳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도록 만드는가?
             


나는 살아갈 힘을 잃어갔다. 세상이 나를 등졌다. 애인도 나를 떠난다. 아 세상 살기 힘들구나. 불현듯 등이 시리더니 배가 고프다. 아뿔싸 돈도 없다. (...) 마음상태도 가닥을 잡지 못하는데, 주머니 사정은 자꾸만 바닥을 향해갔다. 그런 시국에 어찌 외모를 돌볼 수 있으랴. 내가 그렇게 침을 질질 흘리고 다닐 무렵, 저 멀리서 누군가 말했고 신기하게도내 귀가 무언가 캐치했다. “ …집…. 6시간에 1000원…”
천 원짜리로는 친구 둘이 오붓이 아이스크림도 같이 사먹지 못하는 시대다. 뭐가, 도대체 어떤 집이? 6시간에 뭐가 천원 이라는 거지? 자네, 어서 말을 해보라구,! 응 ?
나는 일단 엿보기로 하였다. 처음 간 날, 지음이라는 집사와 아규라는 마님이 나를 맞았다. (나의 상상속의 첫인상이었다. 어느 날 불쑥 아주 불친절하게 다가온 나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아주 친절하게도 새로운 세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음. 그래요. 음. 그렇단 말이죠. 아하.
 그런데 이거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곳이었다. 여긴 어디지? 이 건물이 4층 이래서가 아니고, 나 뭔가 약간 땅과 사이를 두고 떠오른 거 같지 않아? 이거, 그 정체만은 비밀에 부쳐진 채 이상의 시간 을 누비는 하울의 성 같은 것이 아닐까? 내가 나가고 나면 문 위에 달린 추가 변하고 다른 세계의 손님을 맞을지도 모른다.
뭔가, 나. 나이스 캐치 한 게 아닐까. 나는 일단 탐험해 보기로 했다.


지구 궤도 4 – 44
나의 이름은 지구법칙으로 장정란
나의 목적은 공기가 있는 지구에서의 공중부양
나는 즐거운 현재를 위해 지구에 왔다.
나는 지금 빈집에 살고 있다.
 
지구, 빈 집에 와서 한 일
즐거운 일에 동참하기
나누는 일에 동참하기
고양이 러니 똥 치우기
빈집 사람들과 놀기
진보넷 불로거 배 빈집 영상 만들기
빈집에 ‘빈’ 만 보거나, ‘집’ 만 보기
(정란, 2008년 8월 13일 빈집 홈페이지)


빈집을 경험한 사람들이 말하는 낯선 감각은 무엇보다 우선, 이방인인 자신이 스스럼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험에서 오는 듯 하다. 빈집에서 3년간 살고 있는 한 구성원은 이렇게 말한다. “처음 빈집에 온 날. 뭐냐. 그때 옆집이 비어있어서 그리로 갔거든. 그때 집에 아무도 없고, 날 안내한 사람도 금새 나가야한다면서 이거저거 설명해주고, 뭐 심지어, 마루에 돈통이 있는데, 뭐 식재료나 공동으로 필요한건 거기서 돈 꺼내서 사면 된다고 하더니 그냥 나갔어. 나만 두고. 집에 아무도 없는데 말야. 나 혼자 거기 한나절 있었던거 같아. 되게 이상했지. 이 사람들 뭐냐. 내가 도둑질을 할수도 있고, 아무튼 모르는 거잖아. 근데, 뭔가, 기분이 이상한데. 나 혼자 거기 있는데도 엄청 환대받은 기분?”
이 인용문에서 발견할수 있듯이, 빈집을 이상하게 만드는 건 타자에 대한 환대만은 아니다. 빈집의 구성원들이 돈을 다루는 방식 또한 특이하다. 이건 사실 연구자 스스로의 경험이기도 한데, 2008년부터 2012년까지 4년간 중국에 거주했던 나는 두어번 한국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단기 투숙자로 빈집에 머물렀다. 손님들은 숙박비와 식비로 하루 2천원의 돈을 내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문제는 아무도 누가 얼마를 내야하는지 계산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점이었다. 돈은 -분담금이라고 쓰인 쪽지가 붙은 채 마루 어딘가에 방치되어 있는- 초록색 플라스틱 통에 넣으면 되고, 쌀이나 휴지같은 필수품이 떨어지면 아무나 그 돈을 이용해 사오면 된다, 라는 식이었다. 투명한 돈통 안에는 언제나 만원짜리와 천원짜리 지폐들 몇장과 동전들이 들어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거 괜찮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님들이 알아서 양심적으로 돈을 내지 않으면 어쩌려고 저러나는 생각을 넘어, 누가 훔쳐갈 가능성까지 염려되었던 것이다. 빈집은 언제나 너무 많은 이방인들로 바글거렸으니까.
물론, 빈집을 이상하게 만드는 이유는 몇가지 더 있다.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든가, 가사일을 분담하는 방식이라든가. 아무튼, 사회에서 ‘정상'이라고 간주되는 방식과는 다른 어떤 지점들이 뒤섞여 빈집을 정의하기 어렵게 만든다. 빈집을 처음 열었던 사람들 중 하나인 지음이 썼듯이,


빈집은 누구나 비용을 내고 올 수 있다는 점에서 게스트하우스다. 하지만 사장도 노동자도 서비스도 없이 모두가 동등한 주인이자 손님이라는 점에서 공동체와 유사하다. 또한 빈집은 분명 삶의 많은 것들을 공유하는 공동체다. 하지만 어떤 동일한 가치로 모인 사람들도 아니고 가입과 탈퇴가 자유롭고 구성원의 변화가 심해서 공동체라고 말하기 어려울때가 많다. 오늘 규칙을 만들어도 내일이면 구성원이 변해있다. 변화가 심하고 서로 바쁠때는 단지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일 때도 많다. 그렇다고 빈집이 단지 주거공간을 같이 쓰는 쉐어하우스 같은 형태의 공동주거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보통의 공동주거는 보증금과 월세를 정확히 나눠내고 자기 자본은 명확하게 하는데 비해 빈집은 자본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 한편 빈집은 도심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살아갈 수 있는 극빈자들의 주거시설이기도 하다. 하지만 빈집사람들은 국가나 기업, 부자 등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지원받지도 않는다. 또 비용은 최소이고 많은 경우 수입도 최하위에 있지만 꽤나 풍요로운 삶의 질을 누린다. 오히려 빈고는 아직 빈집에 살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잉여금의 일부를 기부하기도 한다. (지음, 공유, 자치, 환대를 실천하는 공동체들의 공동체 빈마을 이야기)


빈집의 이러한 모호함은 빈집이 홈페이지에서 그 스스로를 소개하는 방식 --중의적인 의미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빈집'이라는 단어와, 그 단어의 역설적인 의미전환--을 통해서도 선명히 드러나고 있다.


게스츠하우스(Guests' house)는 '손님들의 집'입니다. 보통의 게스트하우스(Guesthouse)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들러서 먹고, 마시고, 놀고, 쉬고, 자는 공간입니다.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게스츠하우스에는 서비스를 해주는 주인이 따로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게스츠하우스에는 주인이 아주 많습니다. 과거에 왔던 사람들, 현재 같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미래에 올 사람들 역시 모두 게스츠하우스의 주인들입니다. 당신 역시 이 게스츠하우스의 주인들 중 하나입니다. 마음껏 이 공간을 활용하십시오.
당신은 게스츠하우스의 주인으로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합니다. 물론 당신은 당신 전에 왔던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가꾸고 준비해 온 것들을, 함께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베푸는 호의를 맘껏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들에게, 그리고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가꾸고 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게스츠하우스는 계속 새로 만들어지는 공간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들어와서 어떻게 변해가고, 그들이 어떻게 이 공간을 활용하고 만들어가는가에 따라 게스츠하우스는 변해갈 것입니다. 게스츠하우스는 비어 있는 집, 빈집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넉넉하게 누구든 맞아들일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채울 수 있습니다. 빈집은 이름마저도 비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정말 잘 오셨습니다. (빈집 홈페이지)


그래서, 빈집은 무엇인가? 빈집을 구축해온 가장 중요한 두가지 원리가 실은 ‘빈집'이라는 이름 속에 이미 내장되어 있다. (이후의 연구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지난 6년간 빈집 구성원들은 심각한 갈등이나 의견의 차이가 있을때마다, ‘빈집'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빈집이 빈집이기 위해서는 결코 놓을 수 없는 기본원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로 되돌아오곤 했다.) 첫번째. 빈집은 그 정의상 주인이 없는 집이다. 빈집의 시작인 ‘아랫집’을 계약한건 가난한 삼십대의 청년 세 사람이다. 그들은 자신의 전재산을 합쳐 전세금을 마련하고는 (물론, 그걸로는 모자라 융자를 받아야만 했다.) 스스로를 ‘손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집에 대한 소유권을 거부한다. 블로그등을 통해 이, 주인 없는 집에 대한 홍보를 하고 대대적으로 집들이를 연 그들은, 집들이에 온 (무려 60명이 넘는) 손님들에게 그 공간이 완전히 열린 ‘공유지'임을 알린다. “비어있는, 가난한, 손님들의 집”이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빈집’이라는 이름이 그 자리에서 집합적으로 채택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대도시 거주자들에게 가장 강렬한 욕망의 대상인 집을 소유물에서 공유지로 전환해버린다. 그 후 1년동안 세 채의 집이, 같은 방식으로 열렸다. 돈이 있는 사람들, 혹은 돈을 빌려올수 있는 사람들이 전세금이나 보증금을 모아서 집을 얻고, 원하는 사람이면 (보증금을 내건 못내건) 누구나 함께 살수 있다고 선언한다. 월세와 은행 이자, 식비와 전기세등은 ‘분담금’이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똑같이 나눠서 낸다. (보증금에 대한 기여여부는 상관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자본과 공간을 공유하기 시작한 빈집의 원리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의 원리를 닮았다. 물론, 재산을 몰수하고 공공화하는 국가따위는 여기 없지만.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관계, 즉 공산주의적 관계에 사실은 우리 모두가 이미 익숙하다는 점을 환기해야 한다. 데이빗 그래버는, 모든 인간사회의 경제적 관계의 바탕에는 공산주의, 계급조직, 교환이라는 세가지 도덕적 원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우선, 자본주의를 지배하는 원칙인 교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등가라는 관념이다. 거기서 어느 한쪽이이 실제로 이익을 남긴다고 할지라도, 교환은 등가 관계, 혹은 상호성이라는 개념 아래서만 이루어지며, 교환에 참여한 양측은 평등한 관계로 간주된다. 동등한 관계의 양편이 합의하에 교환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환이 완성되는 순간 관계는 논리적으로 종료된다. 한편 계급적 관계의 경우, 양측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상호성이 아니다. (일테면 자선은 언제나 일방향으로 작동한다. 계급적 관계에서는 무언가를 주고받을때조차, 양측의 주고받는 물건의 가치는 질적으로 측정 불가능한 것이 된다.) 이 관계는 예전부터 지속되어온 방식, 즉 전례의 논리에 따라 작동한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적 관계가 있다. 이는 어머니가 자식에게 주는 것을 계산하지 않듯이, 서로 주고 받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 관계이며, 가족이나, 혹은 아주 가까운 친구들을 관계 짓는 원리이다. 


이러한 설명하에 데이빗 그래버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 하는 공산주의를, 국가를 탈취한후 건설한다는 식의 신화적 공산주의와 구분할 것을 요청한다. 공산주의는 "마술같은 유토피아도 아니며 생산수단의 소유와도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사회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던 원리이다. 우리 모두가 어떤 관계에서는 공산주의자처럼 행동하고, 어떨때는 계급적 관계를 맺으며, 어떤 순간엔 자본주의자가 된다. 하지만 어떤 공동프로젝트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작업을 일일이 계산해서 교환하는 대신 최대한 서로를 돕는다는 의미에서- 거의 예외없이 공산주의의 원칙을 따른다. 중요한 점은, 어떤 관계를 우리의 경제적 관계의 도덕적 기본으로 삼을 것이냐는 점이라고 지적하며, 데이빗 그래버는 “모든 사회 시스템들은, 심지어 자본주의 같은 경제 시스템도 언제나 현실에 존재하는 공산주의의 근본원리위에 세워진다”고 역설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에 존재하는 무엇”으로서의 공산주의를 “기본 공산주의"라고 명명하며 그래버는 모든 공동체, 가족과 친구들은 "개인주의적 공산주의 관계들, 말하자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뿐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다는 원칙의 바탕에서 작용하는 일대일의 관계들이 종횡으로 교차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가 얼마를 냈는지 일일이 계산하지 않으면서 기꺼이 함께 사는 관계, 개인의 소유물을 공유지로 바꾸고 집합적으로 관리하는 삶을 시도하는 빈집 구성원들은 그래버가 말한 의미의 공산주의를 빈집을 구성하는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게스츠하우스는 비어 있는 집, 빈집입니다. 비어 있기 때문에 넉넉하게 누구든 맞아들일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채울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그러한 관계를 ‘누구'와든 맺겠다고 선언한다. 문제는, 빈집이 주거공간인 이상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공간적 제한이 있다는 점이다. 무한대의 사람들과 한채의 집을 공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빈집을 비어있는 집, 누구라도 맞이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빈집을 끊임없이 증식시키는 것, 빈집을 확장해 나가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빈집에 산다는 것은 공산주의적 관계를 ‘확장'하는 운동의 일부가 될 것을 요청받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 6년간 빈집의 구성원들은 더 이상 새로운 단투나 장투를 받기 힘들 정도로 각 집의 인구밀도가 높아질 때마다, 새로 빈집을 열었다. 새 집을 여는 것, 사람들이 들어와서 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많은 시간과 노력은 물론, (빈마을의) 공적자금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무수한 논의와 갈등 또다. 이 과정이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빈집은 언제나 그렇게 만들어져왔다는 자각, 다른 누군가 공유지를 구축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들어와서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자각이다. “이곳을 당신이 쓸 수 있게 되기까지의 앞의, 다른 사람의 은덕이 자신에게서 멈춰선 안된다. 우리 모두의 노력은 특정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골고루 돌아가길 바라며 쌓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얻었는가? 값싸고, 즐겁게 살 수 있는 환경을. 그 조건은 사실 당신이 얻은 만큼 누군가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지각생, 2009, 10/15). 새로운 투숙문의가 끊이지 않는 빈집에서, 구성원들은 새집을 열고, 그럼으로서 빈집의 의미가 살아있게 할 것인가, 혹은 이 공간을 -그리고, 빈집이라는 개념을- 닫아버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힐수밖에 없다. 이는 어떤 이념나 윤리 이전에, 삶의 조건으로서 빈집의 구성원들에게 던져지는 문제이다. 때문에 빈집에 머물기 시작한 ‘손님'들은, 정란이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빈집에 ‘빈’ 만 보거나, ‘집’ 만 보기,” 즉 ‘빈'의 의미와 ‘집’의 의미를 고찰하기 시작해야만 한다.


    “공산주의적 관계의 확장”이라는 빈집의 원리는 빈집이 갖고 있는 ‘암묵적 재정 원칙’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여기서, 구성원들은 그들 스스로 ‘암묵적’이라는 단서를 붙인다. 구성원이 늘 바뀌는 빈집에서 ‘명시적'인 원칙을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집'이 그 정의에 이미 품고 있는 ‘공산주의’적 원리는, 빈집에 고유한, 재정에 대한 독특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이 글에서 살펴볼 ‘암묵적' 재정원칙의 목록은 빈집이 빈마을로 확대되는 와중에 구성원들이 마을금고의 필요성을 논의하면서 정리된 것이다. 마을이 확장되고 마을 금고가 공동체 은행으로 바뀌면서 빈집의 재정원칙들이 조금씩 변하는 과정, 또한 이러한 원칙들 아래 어떤 구체적인 실천들이 구성되는지는 이후에 다시 자세히 논의하겠지만, 이 글에서는 우선 빈집의 일상에서 암묵적으로 형성되어온 재정원칙들이 ‘공산주의'를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빈집의 암묵적인 재정원칙들>
1. 돈 갖고 있는 거 자랑 아니다: 출자금에 대한 보상 없음
2. 돈 빌려온 거 자랑 아니다: 대출금을 빌려온 자에 대한 보상 없음
3. 개인적 소유는 인정한다. : 원금상환. 출자는 오로지 자의에 따른다.
4. 집은 사지 않는다. : 전월세의 경우가 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다. 부동산 투자에 대한 반대.
5. 집으로 돈 벌지 않는다.: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6. 공간분담금은 누구나 내야 한다.: 월세+이자+공과금에 대한 공동 부담.
7. 공간분담금은 누구나 낼 수 있는 금액이어야 한다.: 하루 2000원 이상. 최저임금 기준 30분.
8. 공간분담금을 낸 사람이라면 누구든 빈집의 주인이다.
9. 매달 재정 정산을 해서 적자는 어떻게든 그달에 메꾸고, 흑자는 그냥 모아둔다.
10. 모인 돈은 빈집의 확대, 확산에 쓰인다.
11. 재정은 완전히 공개하고, 관리는 돌아가면서 한다.
12. 확장을 위한 자금 : 사람이 모이면 돈도 모이지 않겠나.
13. 등등 (2009/9/7)


이윤을 발생시키지 않는다거나 부동산 투자에 반대한다는 점, 남은 돈은 빈집 -즉 타인이 들어올 공간-의 확대에 쓰인다는 점에서 빈집의 재정원칙이 자본주의의 그것과 선을 긋고 있음은 분명하다. 출자와 상환요청은 오로지 자의에 ,의한다는 원칙 3은, 빈집의 재정원칙을, ‘재산의 몰수' 같은 ‘공적' 형태로 공산주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현실국가사회주의의 태도와도 분리하고 있다. 원칙 1과 2에서 말하듯이 빈집을 위해 돈을 출자하는 것은 (심지어 돈을 융통해서 출자하는 것 또한) 전적으로 개인의 능력, 혹은 의지에 따른다. 한편, 각자는 자신의 재정적 ‘능력에 따라’ 출자한다. 당신은 당신이 할수 있는만큼, 혹은 하고 싶은 만큼 출자할수 있으며, 그러한 행동은 빈집을 가능케하는 기반으로써 환영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행동은 (공산주의의 원리에 의거하자면) 당연한 것이므로 자랑하거나 보상을 요구할 이유는 없다. 다른 한편, 하루에 2천원으로 책정된 분담금에 대한 원칙 (원칙 6.7)의 경우, 자본주의적 ‘교환'이라는 시각에서 볼때 가장 ‘정상적'인 재정원칙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거기에조차 일종의 ‘애매함’이 개재되어 있다는 점을 보아야만 한다. 월세와 이자, 식비와 공과금을 다 포함한 금액으로서 ‘누구나 내야하는' 분담금은 ‘누구나 낼 수 있는' (가상적인 의미에서의) 최소 금액 -당시 1시간당 최저임금 약 4000원의 절반 정도-으로 책정되었다. 대신 거기에는 ‘이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분담금은 2천원이 아니라 2천원 ‘이상'이다. 이 ‘이상'은, 각자의 ‘능력에 따른' 부분이며, 빈집에서 중요한 실천으로 강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들 돈이 없어서 같이 사는 건데, 여기선 돈 아끼고 다른 데서 돈을 많이 쓴다던가, 우리가 정한 최소한의 분담금이 ‘2,000원 이상’이었고, 이 ‘이상’이 더 중요한 거였거든요. 실제 모두 2,000원으로만 내서는 빈집의 바퀴가 굴러갈 수 없어요. 일하는 것도 자기가 먹은 것만 치울 수 있는데, 늘 잉여분이 있고, 그러면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분담금도 더 내는 사람이 있고, 일도 더 하는 사람이 있고요. (지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터뷰 중)


빈집을 형성시킨 첫번째 원리가 공산주의적 관계의 확장, 즉 자본주의적 ‘소유권'의 문제를 돌파하는 것과 관련된다면 또하나의 핵심적인 원리는 빈집은 무엇인가라는 문제, 즉 빈집의 ‘정체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테일러는 근대적 삶의 방식을 극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성한 대안적 공동체들의 경우, 특정한 가치, 혹은 단일한 신념체계 아래 형성된다는 점을 지적한바 있다. 이런 측면에서 빈집 구성원들의 태도는, 그 시작 단계에서부터 테일러가 설명한 대안적 공동체, 혹은 동일한 가치로 형성되는 닫힌 공동체들과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히려 아이디어를 얻은 곳은, 공동체가 아니었고 배낭여행할 때 갔던 ‘게스트하우스’들이었어요. (......) 공동체는, 관심은 있는데 공동체라고 불리는 것들이 갖는 딜레마나 문제점들이 마음에 들진 않아요. 이상하게 동일한 것으로 묶이면 그 순간 동일하지 않은 것이 생기고, 공동체 외부라는 게 생기고 그렇게 되면 공동체로 들어가기 위한 절차라든가 그런 게 생기잖아요. 또 다양한 많은 사람들을 묶어내고 동일한 가치 아래서 움직이게 하기 위해 종교라는 매개가 거의 필수적이 되어 결과적으로 다들 유사하게 되는데, 전 그런 게 공동체가 가진 본질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한 공동체는, 극단적으로 열린, 열려있지 않으면 안 되는, 열려져 있기 때문에 지속되는 그런 공동체에요. 그래서 누구나 와도 되고, 누구나 왔을 때, 그 자체가 공동체 자원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형태가 있으면 되면 좋겠다 그런 생각은 했어요. (지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터뷰 중)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빈집의 구상에는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삶에 대한 욕망뿐 아니라 단일한 가치로 구성되는 삶 에 대한 저항감이 함께 하고 있다. 이는 빈집을 두가지 의미에서 ‘비워’내도록 이끄는데, 그 첫번째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집'에 대한 소유권의 거부 - 혹은 공산주의적 관계의 확장- 이라면, 두번째는 바로, ‘정체성'의 소유권에 대한 거부이다. '“빈집은 이름마저도 비어 있습니다. 당신이 그 이름을 지어주십시오.” 라는 기묘한 ‘자기’ 소개가 보여주듯이, 빈집의 구성원들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정체성, 혹은 자기동일성 identity을 갖는 것을 거부한다.


빈집의 구성원들이 규정된 정체성을 거부하면서 어떻게 집합적 공동성 commonality와 리듬을 만들어내는가의 문제는 이후에 다시 논의하겠지만 여기서는 우선, 이러한 정체성 소유권의 거부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 property ownership를 극복하고자 하는 빈집의 첫번째 원리와 맞물려있다는 것을 말해두고 싶다. <꼬뮨주의와 소유>에서 고병권은 ‘소유'의 의미를 고찰함으로써 꼬뮨주의적 소유가 사적소유에 반대할 뿐 아니라 정체성의 소유마저 거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공산주의를 ‘사적소유의 철폐’로 정의하며 맑스는, 사적소유가 인간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프루동 또한, 소유의 기원이 자연적 원인을 갖는다는 사고방식을 비판하며 ‘소유’는 오직 ‘소유화' (혹은 도둑질)를 통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한다. 수많은 공유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그곳에 함께 기대어 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추방하는 과정이 바로 ‘사유화'의 본질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무수한 사례들이 말하고 있다. [각주1 : 이러한 사유화/도둑질의 과정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폭력에 의해 현재에도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소유’의 문제가 ‘재산' 뿐 아니라 ‘정체성 (동일성, identity)의 문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이다.


정체성, 혹은 자기-소유권 (self-ownership)의 해체를 시도한 철학자 데리다를 인용하면서, 고병권은 소유 property라는 단어가 일상생활에서 ‘재산'과 ‘고유성'이라는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데리다는 이 두 단어의 어근을 이루는 propre에서 파생된 단어 appropreation에 ‘자기것으로 만든다'는 의미의 ‘전유'는 물론, ‘주체의 동일성'을 구성한다는 의미의 ‘고유화'가 내포되어 있음에 주목했다. 소유가 소유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듯이 고유화의 과정은 자기 동일성의 구성에 언제나 선행한다. 우리가 “천부적이라 믿었던 정신과 신체, 힘과 재능, 정체성 역시 후천적으로 생산된 것이고, 얼마든지 처분과 박탈, 도둑질이 가능” (고병권) 한 것이다. 정체성이 생산되고 박탈되며 처분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정체성이 어떻게 생산되고 관리되는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우리로 하여금 끝없이 스펙을 쌓고, 경쟁력을 갖추며, 자신을 홍보하는 “자기개발자"가 되도록 강제하는 건 어떤 힘인가? 사적소유의 극복은 “인간이 전면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전면적인 본질을 전유" (경제학-철학 수고)하는 것, 즉, “인간이 세계와 맺는 모든 인간적 관계, 즉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직관하고, 지각하고, 원하고, 행동하고, 사랑하기"의 전면적 변화라는 맑스의 말 또한,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문제는 특정한 방식으로 생산된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적이지 않은 주체, 전혀 새로운 인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정체성 소유권을 적극적으로 버리는 빈집의 시도, 동일한 정체성으로 묶이지 않는 열린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빈집 구성원들의 실험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비어있기 때문에 누구나 넉넉하게 맞이할 수 있고, 또 무엇이든 채울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빈집은, 어느 기간에, 누가, 어떤 집에 머무는가에 따라 계속해서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 비-정체성의 공간이자 무-규정성의 공간으로 규정되고, 원하는 누구나에게 열려있다고 선언됨으로써, 빈집은 무수한 ‘이질성'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개방하고, 그럼으로써 끊임없이 ‘다른것-되기'를 감행할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위치에 놓인다. [각주2 : 자기-동일성을 구성하는 대신 타자와의 충돌과 섞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빈집이, 어떻게 공동성 commonality을 생성하고, 혹은 실패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이 연구의 중요한 목적이다. 기원적 순수성이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이종교배와 혼합에서 비롯한 혼종적 정체성으로 아프리카를 읽어낸 에드워드 글리쌍은, 타자를 배제, 추방하며 구성하는 자기-동일성을 뿌리-정체성이라고 규정하며, 반대로 타자와의 만남, 교섭, 충돌 속에서 다양한 방향으로 재-구성하는 관계-정체성에 대해 말한바 있다. 이는 타자에 대해 열려있고,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자기를 발견/확립해 나가는 탐색으로서의 정체성, 혹은 떠돌이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후의 장에서 검토하겠지만 ‘정체성'의 소유권을 거부한 빈집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사건 속에서 공동성을 구성하는 방식은 글리쌍의 관계-정체성과 맞닿아 있는 듯 하다.]


빈집은 거기에 머무르는 사람을 떠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때,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행동과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때 그때 규정되는 무엇이 빈집일 것입니다. 오늘 A와 B, C가 살고, 한 달 후 C와 D, E가 빈집에 산다면 오늘과 한달 후 빈집은 공통점은 있지만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지각생, 장투의 조건 2009.9.27)


‘정체성' 소유의 거부는, 빈집을 이루는 또하나의 근본적인 실천적 원리로 이어진다. 빈집을 규정되지 않는 공간으로 규정함으로써 빈집의 구성원들은 어떤 공동체에서나 구성원간에 생길 수 있는 ‘위계'의 가능성을 급진적으로 지우기 시작한다. 주인없는 집에서, 이 곳은 “원래" 그러니 여기 살고 싶으면 이 규칙에 따르라고 말 할수 있는 사람은 없다. 모든 구성원이 ‘손님'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규칙을 만들거나 자기의사를 ‘관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순간순간 암묵적인, 혹은 잠정적인 규칙이 만들어진다해도 그것은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할 것이다.) 당신은 이 공간에 이름을 지어줄수 있지만, 빈집의 이름이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또한 납득해야만 한다. 주인도, 정체성도 없는 공간으로서의 빈집에서 손님들은 대등한 관계로 마주친다. 구성원들은 어떤 위계나 권위도 인정하지 않은채 소통하는 방법을 -그것이 때로는 한없이 지난한 과정일 될 지언정- 익혀야만 한다.


어떠한 권위나 위계관계도 허락하지 않는 소통방식. 이는 아마도, 길 위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소통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식일 뿐 아니라 아마도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위계 hierarchy, 혹은 계급적 관계는 전례의 논리를 따라 작동한다.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당사자들이 그 관계의 틀로 우월이나 열등을 받아들이고, 또 그 관계가 부드럽게 진행중이어서 거기에 독단적인 힘을 더 이상 가할 필요가 없을때, 그 관계는 습관 또는 관습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그래버). 반면, 단지 길 위에서 만났다 헤어지는 여행자들 사이에는 위계가 형성될 여지가 없다. 서로 이해와 요구가 맞는 한에서 동반자나 대화상대가 되지만, 그 사이에 어떠한 불편함이나 강요가 끼어든다면 그 관계는 그 순간 끝날 것이다.


여행자들은 그들이 다시 만날 기회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자신이 가진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에게 필요없는 것을 서로에게 나줘주며 공산주의적 관계를 형성한다. (게스트하우스에 묵어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보다 훨씬 관대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아마 눈치채고 있으리라.)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를 지극히 당연한, 유일한 삶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조차, 여행을 할때만은 공산주의적 관계를 추구한다는 점은 흥미롭다. (지역주민에게 초대를 받은 경험이나,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은 경험을 여행에서 얻은 최고의 무용담으로 여기는 한 편, ‘지나치게' 상업화된 여행지에 대해 투덜대는 무수한 관광객들!) 기꺼이 공산주의적 관계의 일부가 되며, 여행자들은 커다란 의미에서 선물의 순환을 창조한다. 자본주의적 교환과 달리 공산주의적 관계는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다 (그래버). 그것은 다만 “영원성을 전제한다. 사회는 거기에 계속 있을 것”이라는. 


아규랑 여행 다니면서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인데, 스스럼없이 데리고 가서 재워주고 했던 일들에서요. 빈집을 시작하면서 그런 생각은 했어요. 빈집에 장기 투숙자가 많이 생기면 공동체 같고, 단기 투숙자가 많으면 게스트하우스 같겠다 하고요. 지금 생각해도 희한한 건, 여행지라서 그랬는지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한 방에 열 몇 명씩 같이 자고, 살았던 거예요. 그리고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는 사람들도 있고요.  (지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터뷰 중)


문제는, 현실에서의 빈집이 -그 이름이 어떻든 간에- 여행자들을 위한 게스트하우스라기보다는 삶의 공간이라는 점이다. 계산하는 대신 대충 나누는 관계,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자신이 해야하는 것 ‘이상'을 기꺼이 하는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기존 구성원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와 무관하게, 새로운 구성원이 거기에 동참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만약, 빈집이 제공하는 모든것을 누리면서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혹은 누군가가 자신이 투여한 노력에 대한 ‘권리'나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측면에서, 어떠한 권위도 거부하는 동시에 빈집의 공통성, 긍정적인 문화를 구축하기 위한 고군분투가 엿보이는 지각생의 포스팅 ‘장투의 조건과 의무' 연작은 흥미롭다. 그는 빈집에서는 “어떠한 철학, 사상, 생활양식이 광범위하게 동의되고 지지받는다고 해서, 마지막 한명까지 모두 그 철학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되는 걸 위험하게 생각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동시에 그것이 “서로 떨어져 표류하는 삶을 원해서”는 아님을 덧붙인다. 그렇다면 빈집이 ‘하숙집'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자발성'은 어떻게 촉발할 수 있는가?


지각생은 "각자 원하는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협력할 것을 권장”하며 글을 마무리함으로써, “각자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의 원리로 되돌아온다. 그는 빈집의 긍정적인 문화를 고민하고 있지만, 동시에 모든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부딪히게 되는 ‘위계’의 문제 또한 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발성'을 글을 통해 ‘독려'하는 것은, 그런 글을 써야만 할 정도가 되어버린 상황의 절박함을 보여줄뿐, 그다지 실효성을 가진 방법은 아닐 것이다. [각주3 : 빈집에서 구성원의 자발성을 촉발하고 공산주의적 관계를 증폭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이후의 장에서 다시 논의하도록 하겠다.] 오히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공산주의적 관계에서 ‘능력’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문제이다. 각 구성원들의 ‘능력'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아니, 각각의 구성원이 가진 ‘능력'을 척도화해서 재고 비교하기 시작할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위계'가 생기기 시작하지 않을까? 그래버가 지적했듯이, 계급적 관계는 종종 공산주의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중세 귀족들에게 ‘베품'은 당연한 의무였다!) 공산주의적 관계는 쉽게 불평등의 관계로 빠져든다. 우리는 빈집에서 말하는 “능력"이 무엇인지 다시 질문해야만 한다.


길에서 만난 여행자들이 어떤 위계도 만들지 않으면서 기꺼이 공산주의적 관계를 형성하고 선물의 순환의 일부가 된다면, 바로 그 때문에 여행이 우리의 인생에서 행복한 기억이 된다면, 우리는 왜 일상에서 그러한 관계를 구축하지 않는가?  일상에서 확대하는 여행자의 공산주의. 이것이 빈집의 기획이다. 빈집 구성원들은 모두 손님, 혹은 여행자이므로 그들의 관계는 ‘상호성'을 기반으로 하는 대신, 잠정적으로 영원하길 기대하는 커다란 선물의 순환을 구성한다. “물론 당신은 당신 전에 왔던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가꾸고 준비해 온 것들을, 함께 있는 사람들이 당신을 위해 베푸는 호의를 맘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 역시 그들에게, 그리고 다음에 올 사람들을 위해서 무언가를 가꾸고 준비할 수 있을” 것이다. 한 편, 현실에서 빈집이 구체적인 삶의 공간이기 때문에 빈집의 구성원들은 ‘위계’의 가능성을 지우기위한 장치를 고안해내야만 한다. 우선 그들은 그 곳의 누구라도 (심지어 빈집을 시작한 구성원조차) ‘손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위계적 관계를 지우고자 한다. 또한, 빈집에서 ‘능력’은 측정될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어야만 한다. 빈집은 각자의 재정능력을 공개하지도, ‘너는 능력이 이정도니 얼마쯤 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빈집 사람들은 원하는 만큼 출자하며, 원하는 만큼 분담금, 혹은 가사일, 혹은 빈집 활동에서 그 ‘이상'의 몫을 하기로 하고 있다. 결국 빈집에서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원하는 만큼 일”하는 것, 즉 완전한 ‘자발성'을 의미한다. 이는 ‘공산주의적 관계를 형성하는' 능력이며, 타인과 함께 사는 능력이고, 어떤 의미에서 그 모든 과정에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능력일 것이다.


이 글의 첫부분에서 나는 빈집을 낭만적으로 그린 신문기사들에 대해 말했다. 어떤면에서 그 기사들은 중요한 진실의 한 조각을 보여주고 있다. 그 진실은, “빈집의 사람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족이나 정말 친구들에게나 줄 수 있는 걸 타인들에게 주고있다”는 말로 요약될 수 있을것이다. 타인에게 삶의 자리를 내주는 것. 타인과 돈과 집을 공유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것. 다시 말해, 빈집 구성원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타인과 공산주의적이며 평등한 관계를 맺어나감으로써 자본주의적 대도시의 한가운데서 여행자의 공산주의를 확대하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한 편, 그 신문기사들이 결코 말하지 않은 다른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똑같은 이유 때문에 빈집은 서로 다른 교환의 윤리와 감수성들간에 각축전이 일어나는 전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다들 돈이 없어서 같이 사는 건데, 여기선 돈 아끼고 다른 데서 돈을 많이 쓴다던가, 우리가 정한 최소한의 분담금이 ‘2,000원 이상’이었고, 이 ‘이상’이 더 중요한 거였거든요. 실제 모두 2,000원으로만 내서는 빈집의 바퀴가 굴러갈 수 없어요. 일하는 것도 자기가 먹은 것만 치울 수 있는데, 늘 잉여분이 있고, 그러면 누군가는 자발적으로 치우지 않으면 안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분담금도 더 내는 사람이 있고, 일도 더 하는 사람이 있고요. 그런데 분담금이나 일에 무관심하기도 하고, 우리는 자본주의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가는 방식인데, 그걸 철저히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이해하고 그렇게 하더라고요. 그렇다고 그걸 막지도 않았고, 막을 수 있는 기제도 없었고요. (지음, 우리신학연구소와 인터뷰 중)


빈집은 정치적 지향이나 이념과 무관하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그러나, 빈집에 사는 이상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어떤 방식으로건 바꿔내야만 한다. 빈집은 무엇보다 기본적인 ‘삶의 공간'인 집의 공산주의를 확대하는 실험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빈집은 서로 다른 신체와 감각들이 부딪치고, 협상하고, 굴절하는 전장일 수 밖에 없다. 서로 다른 주체성들의 교섭과 충돌이 어떤 집합적 변이를 촉발하고 어떤 공동성을 구성해왔는지 살펴보는 것은, 도시에서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운동으로서의 빈집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그러나 빈집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미시정치를 분석하기 이전에, 여행자의 공산주의를 확대하는 운동으로서의 빈집이 어떻게 윤리나 이념의 차원에서가 아닌 일상의 차원에서 전개될 수 있었는지를 한국사회의 사회문화적 맥락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듯 하다.


2장 이하 추후 번역 예정